30주년 기념 인터뷰

Q. 01

30년 동안 하성이
쌓아온 성과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30년 동안 하성한의원이 쌓아온 성과
여러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선 치료법을 얘기하자면,
특허출원을 한 하성탕, HS전통침, HS파동침인 장침, 하성운동보감인 운동교정법이 있습니다.
탕약과 침도 계속 연구했지만 무엇보다 운동법에 많은 노력을 했던 것 같습니다. 운동법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이유는
턱관절과 경추에 대한 부분을 잡기 위해서 30년 동안 정말 많은 노력을 했고, 그 부분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조적인 원인 중에 이명이나 눈의 난치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중요한 파트였기에 연구에 힘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 성과라고 하면 아마도 인식의 전환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처음 이명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아무도 난치성에 도전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비난과 우려 속에서 시작한 난치성 집중치료한의원이 30년이 지난 지금은 많은 한의원에서 진료과목에 포함할 정도로 난치성 귀와 눈 질환이 한방치료로 가능하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진것 같습니다. 기존의 한의학 치료가 예방 위주였다면, 한 쪽 분야긴 하지만 새로운 영역인 치료의학으로서의 가치와 의미가 담겨있다는 점에 조금이나마 기여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세 번째로 성과를 말하라고 하면,
30년간 진료를 하면서 받았던 감동을 가져다준 3명의 사람이 있습니다.
3명의 한의학도가 저라는 모델을 보고 한의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실제로 한의사가 된 모습을 봤을 때 제가 정말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세 분을 한 명씩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가 부원장 시절에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이 안면마비로 치료를 해줬는데, 나중에 그 학생이 수원시 한의사협회에서 개원의사 발표에 제 얘기를 하더라고요. 중학교때 안면마비로 치료를 받았는데 그 후로 한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너무 감동을 했습니다. 저 또한 어린 시절에 안면마비를 한의사를 통해서 치료를 받고 한의사의 꿈을 그렸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발표를 통해 굉장히 큰 감동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너무 설레이고 감사한 일인것 같습니다.

Q. 02

30년 동안
기억에 남는 환자는?

난치성이기 때문에 치료를 하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분들이 몇 분 계셨어요.

대부분 고음에서 쇠깍는 소리로
괴로워 합니다. 고음의 철도 열차 지나가는
소리들이 24시간 365일 난다고 합니다.

한 분이 기억나는데, 케리커처를 가르치는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수면장애가 심해 치료를 받으시다가 결국 투신을 하셨던 분입니다. 그 죽음 앞에서 제가 느꼈던 것은, 그렇게 건강하고, 희망차고, 성품이 좋으셨던 분이 어린 두 딸을 남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만큼 이 질환은 정말 무섭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괴로운 이명을 평생 가져가야 한다는 두려움이 그렇게까지 모든걸 포기할 만큼 그 분에게 공포였던 것 같습니다. 이명 소리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집중할 수가 없고, 잘 수도 없고, 일상 생활을 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케어할 수도 없어서 모든 게 무너지는 느낌이라고 했어요. 건강했던 분이 이 질환 앞에서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할 만큼 힘들어하시는 것을 보면서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여줄 수 있는 방법을 더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외에도 이명과 우울증을 겪으며 반려견까지 죽어 극단적 선택을 하신 분과 음향조절을 하는 직업을 가졌으나 이명 때문에 고음을 분별할 수가 없어 또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하신 분 등 난치성 질환을 하면서 이런 환자들을 대하게 될 때면, 스스로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듭니다. 이명과 같은 난치성 질환은 우울증을 함께 동반합니다. 첫인상이나 치료과정에서 예민하거나 다소 무례하게 대하시는 분들을 뵐 때면 항상 이 분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난치성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은 저마다 사투를 벌이고 있고,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극도로 예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그 어떤 컴플레인이나 무례함도 넘길 수 있게 합니다.

또 마음 아픈 환자 한 명을 소개하자면, 이명 고사를 오랫동안 준비를 하고, 합격을 해서 3일째 출근길에 한 순간에 돌발성 난청이 왔던 분입니다.
아직도 그 환자가 생생하게 그 순간을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몸살감기를 심하게 앓고 난 후 3일째 출근하려고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지하철이 지나가는 소리가 지나가고 지하철을 탔는데 순간 양쪽 귀에 정막상태가 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명까지 동반하면서 전라도에서 강남까지 치료를 받으러 오셨습니다. 톱니바퀴 돌아가는 이명소리는 많이 줄어들었는데 청력은 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가끔 환자들에게 이 분 얘기를 하는데, 왜 나한테 이 질환이 없냐고 억울해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한 순간에 지하철이 지나가고 양쪽 귀가 안 들리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난치성 질환에 화병이 나거나 분노감이 생기는 환자에게 이 분의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이명 고시 공부한다고 공부만 하다가 드디어 원하는 꿈을 이루고 3일째 출근인데 전철이 지나가고 탔는데 갑자기 정막해진 그 상황은 정말이지 그 어떤 억울함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억울해하는 환자들에게 그래도 당신은 한쪽 귀는 살아 있지 않느냐, 그래도 들리지 않느냐고 위로의 말을 전하곤 합니다.
제가 난치성을 놓치 못하는 이유는 호전되어서 감사의 표현을 하는 환자들보다는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던 분들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Q. 03

30년 동안 난치성을 고집하는
이유는?

제 세례명이 모니카입니다.
성녀 모니카는 이교도인이던 파트리키우스와 결혼했는데 남편의 성품은 다소 난폭했고 방탕한 기질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부부는 3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 나비지오, 페르페투아라고 합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기도와 인내로 남편과 시어머니, 아우구스티누스를 개종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던 아우구스티노를 위해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를 했고 끝내 철학과 학문적인 부분을 높게 평가가 되는 성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3명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육아의 우선순위를 바꾸면서 했던 이 일이 보람과 가치가 있지 않으면 제가 나와서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면서 늘 갈등을 했을 겁니다. 만약에 30년 동안에 그 만한 가치가 있지 않고, 그 아이들이 원하는 시간, 요구하는 시간, 필요한 시간에 저의 우선순위를 바꾸지 못하는 일이라면 저는 아마 하지 않았을 겁니다. 누간가 대신 해줄 수 있다면, 그 갈등이 너무 컸을 것 같습니다. 제 도전이 성공을 하던 안하던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고, 꼭 한번 해보겠다고 다짐을 했기에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제 나름대로의 소명이나 몫을 가지지 않는다면 저는 3명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정말 갈등하고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게 30년간 난치성을 다루는 이유입니다.

두 번째로 이 질환을 이렇게 꾸준하게 하는 이유를 말하자면,
난치라고 여겨지는 질환들은 적절한 치료법이 없습니다. 이는 동의보감에도 또 고전에도 치료법이 나오지 않습니다. 난치와 불치로 치료의 방법이나 결과가 나와 있지 않기에 끊임없이 도전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10년 해도 끝낼 수가 없었고, 이렇게 30년 동안 했던 이유인 것 같습니다. 환자가 기대하는 것만큼 결과를 내주지 못했기에, 저를 믿고 치료를 해준 분들이 다시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저의 목표입니다. 또한 한의학이 치료의학으로 장점을 살려서 귀와 눈질환 만큼은 시작은 했으니, 어떠한 의미 있는 결과를 이끌어내고 싶습니다. 후배들에게도 한의학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통해서 한의학에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누군가는 저에게 의사는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연구가 되어있는 분야를 환자들에게 적용해주는 사람이라고 말을 하더군요. 너무나 맞는 말입니다.
완벽하게 치료의 효과를 못 내면 돌려보내는 게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분야를 선택했고, 아무도 안하는 분야이기에, 결과가 30%나 50%에 호전이 된다면 그 또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6년 동안 축농증으로 고생했는데 공부를 하면서 매일 이비인후과에서
고름을 빼내야했으며 치료가 어려웠습니다. 한의학으로 치료가 가능할꺼라 생각했는데, 이 또한 결국 아무도 치료해주지 못했고
결국 제 스스로 연구를 해서 치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축농증을 치료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축농증을 잘한다는 입소문이 나고,
그 와중에 한 환자가 이명이 좋아졌다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코와 귀가 연결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후에 제가 이명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저의 경험을 통한 연구가 난치성 질환 치료에 있어 한걸음 나아갈 수 있는 도전과 사명감을 갖게 했으며, 단 몇 %의 치료 가능성이 있다면 함께 해보자고 환자에게 말을 합니다. 그게 포기하지 않고 지난 30년간 이어온 이유입니다.

Q. 04

30년 동안 기억에 남는
직원은?

많은 직원들이 거쳐갔고, 그 직원들이 있었기에
하성한의원이 이렇게 또 다른 성장을 그릴 수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요. 책 뒷 표지에 직원들 사진이 있는데 왕언니라고 불리는 직원이 있었습니다. 수원이 워낙 가족같은 분위기 였는데 실제로 가족들이 소개로 한의원에 들어옥 되어서, 남편과 남편의 누나까지 한 곳에서 일을 오랫동안에 했습니다. 가족들이 함꼐 일하는데도 트러블 없이 잘 해준 불편함 없이 너무 잘 해준게 고맙더라고요.

또 한 직원을 떠올리면, 17년간 하성한의원에서 일을 했던 실장이 생각납니다. 17년 동안 수원에서 일을 했으니, 수원의 역사를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친구가 이란성 쌍둥이인데 결혼한 남편이 일난성 쌍둥이였습니다. 남편이 치료를 받으러오면 직원들이 항상 헷갈려 해서 우리에게 즐거움을 줬습니다. 이 직원이 아직까지도 명절 때마다 항상 저를 챙겨줍니다. 지금도 같이 일하고 싶은 직원입니다.

세 번째는 강남으로 하성한의원이 옮기면서 직원들에게 롤모델이 된 실장이 있었습니다. 경영이라는 것을 처음 접목하면서 하나하나 틀을 잡아준 직원이 있었습니다. 즐 제게도 쓴 소리를 통해서 하성한의원이 머물지 않고 성장하게 했던 직원이었습니다. 직원들은 직장 상사를 통해서 미래를 본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 실장님이 직원들에게 롤모델이 되어줄 만큼 굉장히 실력있고, 유쾌한 친구였습니다. 직원들은 비용이 아니라 자산이라는 말을 늘 했고, 직원의 성장을 통해 병원이 성장해야한다고 늘 제게 말을 했었습니다. 한의원을 그만두고 회사를 차려서 컨설턴트로 한의원을 다시 맡게 되었으니 정말 깊은 인연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성한의원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한의원을 거쳐 갔던 수많은 직원들의 노력과 열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Q. 05

30년 동안
기억에 남는 하루는?

이명을 치료하면서
침 한번 맞고 효과가 없으면 식사를 하고 오라고 하고,
두 번을 맞고도 효과가 없으면
진료 끝나고도한번 더 맞고 가라고 할 정도로
어떠한 답을 내고 싶어서 몰입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침치료 도중에 심부근 5CM를 자극했는데 그때 갑자기 엎드려 있는 환자가 이명이 멈췄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이 정말 저에게는 잊지 못하는 하루였던 것 같습니다. 그 날에 환자가 엎드려있고, 침으로 자극 하는 순간 멈췄다는 것을 통해서 헤르츠별로 치료의 부위가 다르고, 경추에서부터 귀 쪽의 혈액순환의 부위가 다르고 데시벨 별로 침의 깊이가 다르다는 것을 그날 발견했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출근길에 운전을 하면서 치료경과가 가끔 궁금한 환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3~4분이 떠오르는데 놀랍게도 한의원에 도착했는데 3분이 대기실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텔레파시가 통한다는 것을 느꼈고, 그 분들을 대하는 순간마다 너무 감동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 환자들에 대한 집중이 그 분들을 끌어당긴 것 같아서, 에너지나 텔레파시가 있는 건가 싶으면서 그 하루가 정말 놀라웠던 날이었습니다. 소리에도 주파수가 있듯이 우리 모든 정신적인 에너지에도 주파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도 주파수를 맞출 때 기도가 전해지는 거라면, 환자에 대한 가지고 있던 집중과 몰입도가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정성을 다하면 그 정성이 닿는가는 게 하늘이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집중하고 몰입하면 그 에너지가 현상으로 나타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아리랑 TV에 한의한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주제로 이명 난청에 대해서 50분 강의를 마치고 한의원에 왔는데 일주일동안 팩스로 어마어마한 문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각 국에서의 문의를 답변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진료외의 영역에서 역량을 강화해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고, 난치질환으로 세계화를 해야겠다는 꿈을 그리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